티스토리 뷰

 

 

 

 

한국 최초의 근대 극장인 원각사가 있던 자리


정동극장은 1908년 근대극장과 판소리의 공간으로 개관한 한국 최초의 근대극장인 원각사의 모습을 떠올리게합니다.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이 한 번쯤 방문하는 예술극장인 정동극장은 한국 문화예술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보여주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오늘은 진희에게 특별한 날입니다. 지난 4개월 동안 공연해온 연극 "은세계"의 첫 공연이기 때문입니다. 진희는 지난 1년 동안 단원 중 막내로서 합창이나 단역을 맡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에 너무 긴장해서 한잠도 못 잤습니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진희는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녀는 정동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정동 극장은 그녀와 그녀의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할머니는 지금은 몸이 아파 누워계시지만  몇년전까지만해도 그녀와 진희는 자주 정동극장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녀의 할머니는 그곳을 좋아하셨습니다.

원래 정동극장의 위치는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인 원각사가 위치하고 있던 곳입니다. 1908년에 지어진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는 로마 극장을 모델로 했습니다. 그 당시, 원각사는 약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진희 할머니가 정동극장을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는 그녀와 어머니가 원각사에서 공연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할머니는 당시 6살이었기 때문에, 경험에 대한 기억은 약간 흐릿하지만 그녀가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눈에 비친 열정적인 표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희가 증조할머니의 피를 좀 이어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각사가 세워진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화재가 발생했고 원각사는 문을 닫았습니다.

약 80년 후인 1995년에, 정동극장은 바로 그 자리에 지어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동극장의 명시된 목표는 원각사의 사상을 계승하고 한국의 전통 공연 예술을 발전시키고 모방하는 것입니다. 현관에 들어서자 진희는 아늑한 야외 무대인 "쌈지안뜰"에 놀랐습니다. 정동극장은 이름만 들어도 희미한 문화의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 곳이었습니다.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극장인  1908년 현대극과 판소리를 공연하는 장소로 개관한 원각사의 사상을 복원한 역사가 깊은 극장입니다.일년 내내 즐길 수 있는 한국 전통 공연 예술의 공연인 "한국 전통 무대"와 월간 특별 공연을 개최합니다. "한국 전통 무대"는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기적인 공연으로, 사람들이 한국 전통 예술의 본질과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줍니다. 부채춤, 학춤과 같은 한국 무용의 예로: 산조합주와 가야금 병창과 같은 전통 음악과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물놀이와 같은 더 현대적인 장르의 공연들

외국인을 위한 서비스는 공연 중에 중국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자막이 있고 공연 전에 녹차를 준비하여 한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러한 서비스들 때문에 외국인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원각사

 

한국 신극운동의 요람으로 1908년 창설되었으며, 그해 11월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를 처음으로 신극화하여 상연하였다. 원각사 건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두현은 그의 한국 신극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02년까지 국내에는 연극을 전문적으로 상연할 극장이 없었는데 1902년 정부에서 고종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경예식장으로 지금의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로마식 극장을 본떠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연회장소를 짓고 지금의 극장 명칭에 해당하는 ‘희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원각사의 전신이다.

 

그해 8월부터 칭경예식을 위한 준비로 협률사라는 관청을 두어 기녀들을 뽑아 연희를 교습시켰다. 9월 17일로 예정된 칭경예식이 콜레라의 만연과 영친왕의 두진으로 가을로 연기되자 그 동안 가무를 연습했던 사람들은 "협률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기녀, 삼패, 광대등을 모집하여 희대에서 가무의 공연과 활동사진 상영 등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협률사의 활동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하여 1906년 고종의 명으로 협률사를 혁파하고 건물은 1907년 2월부터 관인구락부 전용건물로 사용하였다.

협률사가 사설단체로 궁내부 관할에서 벗어난 뒤에도 이 건물은 계속 극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908년 1월 하순, 관인구락부가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그해 7월 이인직이 이 건물에 원각사를 개설하면서부터 이 건물을 원각사극장이라 부르게 되었고 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고정되었다. 이리하여 궁내부에서 직할하는 국립극장이 된 원각사에서는 처음 2개월 간은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 등 판소리를 주로 상연하다가 11월 15일 《은세계》를 상연하였는데 당시 신연극이란 이름 아래 상연된 한국 신연극의 효시였다. 그러나 이 최초의 신연극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원각사는 한때 휴연, 1909년 5∼6월에 이인직이 일본 연극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그곳 연극을 답습한 후 《천인봉》 등의 새 극본을 상연하려 했으나 실행치 못하고 《춘향가》를 공연하였으며 다시 일본에 다녀와서 《수궁가》를 공연하였다. 그 이후 국민회 본부사무소로 사용되고 1909년 11월에 폐지되었다.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