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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은 표고 745m로 경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신라에서는 동악이라 하여 동해로부터 침범하는 왜구를 막는 호국의 진산으로 신성시하였다. 이 산에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호국의 염원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감포→대왕암→월성원자력발전소까지의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토함산은 그 너른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바람과 습기를 구름과 안개로 변신시키는 마력의 산이다. 그래서 구름과 안개를 뱉고 머금는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 동해의 물결이 손짓하여 부르고, 불국사 저 아래로는 경주시가가 어미닭 품 안에 든 듯 쌔근거리고 있다. 토함산은 신라를 지키는 강력한 남성의 면모와 어진 여성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 곳이었다.

 

불국사

 

불국사와 석굴암은 온 인류의 이름으로 자랑할 만한 불교 예술의 결정체이다. 불국사에는 현세불인 석가모니를 모신 법화경의 세계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화엄경의 세계, 그리고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경의 세계가 절묘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는 건축 예술의 극치에 이른 설계에 의하여 저 불국의 세계가 지상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경주의 동악인 토함산의 서편 기슭에 자리 잡은 불국사는 조양평야와 모화평야를 건너 남산을 바라보고 있어서 자연경관 또한 좋다. 1천 수백 년을 지나는 동안 갖은 부상을 겪으면서도 옛 모습을 지켜오는 석물들을 제외하고는 임진란의 병화에 불국사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현재의 불국사 모습은 1970년부터 1973년 6월까지 3년 6개월에 걸친 대대적인 복원공사 끝에 되찾아진 것이다. 그러나 원래 2,000여 간이나 되었다는 웅장한 불국사의 모습에 비하면 오늘의 그것은 10분의 1에도 채 못 미친다. 한국 관광의 제 1번지 불국사는 신라의 예술과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겨레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경주의 교통체제는 시가지, 보문단지, 불국사가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시내버스, 택시, 관광버스, 기차 등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시내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불국사까지의 거리는 16km. 1일 평균 5,000명의 관광객이 불국사를 찾는다. 불국사역에서 불국사까지의 지역은 진현동, 마동, 하동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 3동을 통합하여 행정적으로는 불국동이라 부른다. 

 

불국사의 역사를 더듬엉 볼 수 있는 자료로는 3가지를 들 수 있다. <신라국동악토함산화엄종불국사사적>, <불국사고금역대기>, <삼국유사> 등이 그것이다. <불국사사적>에는 눌지왕 때 아도의 청원으로 제 1가람 흥륜사와 함께 제 1선사 불국사를 창건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 황폐해졌고, 법흥왕대에 와서 불국사 중창을 시작하여 진흥왕이 완성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서 오늘과 같은 모습의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불국사사적>은 불국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가장 상세하고 권위 있는 자료임에는 분명 하나, 그 제작 연대와 편찬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논란을 낳고 있다. 곧 편찬자가 일연인 데 비해 그 저술 연대는 '경력 6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력 6년은 고려 제 10대 정종 12년 (1046년)에 해당하므로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고려 25대 충렬왕 11년 (1285년)보다 무려 200년 이상이 앞선다. 그래서 일연의 저서가 아니거나, 연대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에 대한 의구심 마저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불국사고금역대기>에서는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이 출가하여 불국사를 창건 (528년. 법흥왕 15년)하였는데, 부인의 법명인 법류를 따서 화엄법류사, 또는 화엄불국사라 했다고 전한다. 현재의 불국사 안내판 등에는 이 기록을 인용하여 불국사 창건 연대를 528년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불국사의 초창을 법흥왕 때로 보기는 어렵다. 이차돈의 순교 (법흥왕 14년)로 법흥왕대에 불교가 신라의 국교가 되기는 하였으나, 현재 전해 내려오는 불국사의 유물로는 당시의 것임은 물론 삼국통일 이전의 것으로 고증할 만한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덕왕대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했다고 하는 것은 <불국사고금역대기>에서 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의 대상인 김대성이 천보 10년 (751년)에 불국사를 시창했다'고 하여, 위의 두 기록과는 다른 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국사가 김대성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세 주장이 모두 같고, 현재 전해 내려오는 유물들도 대부분이 김대성의 것으로 고증되고 있어 김대성에 의해서 불국사가 건축된 것은 확실하다 하겠다.

 

 

불국사에 얽힌 김대성 설화

 

위의 세 기록은 모두 다음과 같은 김대성의 설화를 싣고 있다. 신라 32대 신문왕 2년 (682년), 모량리라는 곳에 경조라는 여자가 살았는데 그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두상이 커서 마치 성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 하였다. 대성은 자라서 복안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일을 해주고 약간의 밭을 얻었다. 어느 날 흥륜사에서 고승 점개가 와서 복안으로부터 보시로 포목 50 필을 얻고 복안에게 축원을 했다. 그 축원을 들은 대성은 감동하여 어머니의 상의, 복안으로부터 얻은 밭을 송두리째 보시하였다. 그 후 대성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대성이 죽던 날 밤, 대신인 김문량의 집에서는 '모량리의 대성이를 네 집에서 태어나게 할 것'이라는 하늘의 외침이 있었고, 김문량의 부인은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대성은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 모량리에 있는 전세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효성을 다했다. 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어머니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던 것이다. 불국사는 그 후 진성여왕 때 등 수차의 수리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024년. 1172년. 1312년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도 1436년. 1470년. 1514년 등에 중수가 있었다. 불국사가 가장 큰 재앙을 당한 것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약탈에 눈이 어두운 왜병들은 절의 보물을 찾기 위해 각 건물을 샅샅이 뒤져 나갔다. 그러다가 지장전의 벽 속에 감추어진 무기를 발견한 그들은 '아름다운 꽃 속에는 독벌레가 숨어 있는 법'이라고 하면서 승려 8명을 무참히 밟아 죽이고 불국사에 불을 질렀다.

 

난리를 피해 웅수사에 가 있던 당시의 주지 담화는 불길을 보고 달려왔으나 불길을 잡지는 못하고 귀중품들만 약간 건져낼 수 있었다. 대웅전을 비롯한 2,000여 칸의 장엄한 불국사 건물은 이때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석조물만 남게 되었다. 왜병들은 인류 역사상 아름다움에 대한 최대 횡포를 자행했던 것이다. 그 후 불국사는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영조 대에 조금씩 복구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불국사 모습은 1973년에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거친 것으로, 그 이전까지는 자하문. 대웅전. 범영루. 안양문. 극락전 정도가 있었다.

 

경주이야기

 

경주는 대한민국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수많은 역사적, 문화적 유적지로 인해 종종 "벽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립니다. 경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고대 신라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명소 중 하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불국사입니다. 이 고대 불교 사원 단지는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풍부한 문화 유산으로 유명합니다.

 

인상적인 석탑, 조각상 및 기타 역사적 유물이 많이 있습니다. 경주의 또 다른 명소는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 석굴암이다. 동굴은 고대 한국 불교 예술의 놀라운 예이며 거대한 화강암 불상이 있는 곳입니다. 경주의 또 다른 명소로는 다양한 고대 유물과 문화재를 전시하는 국립경주박물관과 신라시대에 조성된 경치 좋은 인공 연못인 안압지 등이 있습니다. 풍부한 문화 및 유적지 외에도 경주는 수많은 공원과 등산로를 포함한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도 유명합니다. 전반적으로 경주는 고대 한국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