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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풍수 지리적 위치

 

먼저, 풍수는 조화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사물과 공간의 배치와 배치를 다루는 고대 중국 철학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환경을 에너지의 자연적인 흐름, 즉 "기"에 맞추면, 개인들은 그들의 삶에서 균형과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서울에 위치한 종묘는 풍수지리의 원리를 구현하는 중요한 문화적, 역사적 장소입니다. 종묘는 조선시대인 14세기에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보존된 유교 왕실의 사당입니다.

 

이곳은 풍수지리학의 기본 원리인 남북축을 따라 조성된 직사각형의 땅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풍수에 따르면, 건물이 향하는 방향은 기의 건강한 흐름을 보장하기 위해 중요합니다. 남북 방향은 음양 에너지의 균형을 만들고 최적의 태양 노출을 제공한다고 믿어집니다. 이 정렬은 또한 행운과 번영을 가져온다고 믿어지는 네 가지 기본 방향과 건물을 정렬시킵니다.

 

종묘의 지리적 위치는 그 방향 외에도 풍수지리적으로도 중요합니다. 그 장소는 언덕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위치해 있는데, 이것은 부정적인 에너지에 대한 보호 장벽을 만드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 언덕들은 또한 평화롭고 사색적인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밀폐감과 사생활을 만듭니다. 종묘의 디자인은 또한 다른 풍수지리적 원리들을 통합하고 있습니다. 정전으로 알려진 본관은 그 자리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길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입구는 앞쪽에 위치해 있어 현장에 기가 원활하게 유입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본당은 주변 지역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그 힘과 위신을 높여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반적으로, 종묘의 디자인과 위치는 한국 전통 건축에서 풍수지리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현장을 자연스러운 에너지 흐름에 맞추고 균형과 조화의 원칙을 통합함으로써 디자이너들은 미적으로 쾌적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중요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종묘는 전 세계의 방문객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는 중요한 문화적, 역사적 랜드마크로 남아있습니다.

 

 

 

종묘 건축물의 배치 

 

종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오늘은 종묘의 건축과 연관된 사실 즉, 그리고 실제로 종묘를 갔을 때 알고 있어야 하는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종묘는 일단 서울의 형국을 보고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동여지도의 중부지역을 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흘러서 황해로 빠져나가고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서울에 와서 주산인 북한산과 백악산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서울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강이 흐르고 안산인 관악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이라는 것은 이처럼 형국이 크든 작든 간에 뒤에 있는 산과 앞에 있는 산의 줄기가 근본을 달리 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 때의 지도를 보면 백악선 앞에 경복궁이 있고 양편에 종묘와 사직이 있습니다.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되었던 조선은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엄격하게 지켰으므로 가운데 궁궐이 있으면 좌측에 묘를 건설하고 우측에 사직을 건설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당시의 종묘와 사직이란 국가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국가의 흥망은 종사의 흥망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이러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정궁인 경복궁이나 종묘, 사직을 훼손시킴으로 해서 조선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음을 인식케 했던 것이고 사직단도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우선 종묘를 설명하기에 앞서 유교에서 말하는 '혼백'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혼백이란 이원적인 뜻으로 인간이 죽었을 때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고 믿었습니다. 이때 혼을 모시는 것이 '묘'이고 땅에 묻히는 백이 '부덤'인 것입니다. 묘는 엄격히 말해 사당 묘와 무덤 묘 두 가지가 있으며 국가차원에서 건설한 것, 완벽한 의례와 최고의 재료와 기술로 조성한 것이 바로 종묘입니다. 종묘는 한마디로 왕과 왕비, 돌아가신 분들의 신주를 모신 곳입니다. 

 

여염집의 경우로 보면 집안에 모시는 가묘와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이 종묘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4대 조상을 모신 종묘를 짓고 나자 한양으로 천도를 결심하였으며, 이후에 궁궐과 성곽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모습에서 중국과의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중국은 새로운 국가가 건설되면 이전 왕도는 불사르고 새 도성을 짓습니다. 그럴 경우에 중국은 성곽을 먼저 쌓고 그 속에다 궁궐이나 종묘를 짓는데, 우리는 성곽을 맨 마지막에 건설했습니다.

 

일반 가정집도 마찬가지여서 중국은 담부터 쌓고 집을 짓는데 반해 우리는 건물을 다 짓고 마지막에 담을 쌓은 것이죠. 조선 건국 시 도성건설은 일단 좌고우면 하고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등의 문들을 건설하면서 성곽을 쌓아 나가는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도로의 기본은 열십자로 트인 대로는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도로, 경복궁과 지금의 광화문 네 거리의 도로, 남대문과 광교로 빠지는 도로가 기본이었던 것입니다. 세종로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도로이며, 지맥을 끊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진 도로는 종묘와 창덕궁 사이의 길, 경희궁을 가른 정릉길 등 무수히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