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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2
왕의 침전인 강녕전은 1395년 태조 4년에 창건하고 정도전이 건물의 이름을 지었다. 강녕은 5복의 하나로서, 임금이 강녕하면 그 혜택이 백성에게 이른다고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 고종 4년에 다시 지었다. 1867년 다시 불에 타 1888년 중건하였으나, 1917년 불에 탄 창덕궁의 내전인 회정전을 다시 짓는다는 구실로 철거하여, 목재를 옮겨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음과 양이 결합하는 침전에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가로막는다고 하여 없앴다고 한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1394년에 처음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 건물은 1869년 고종 6년에 새로 창건한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중앙에는 대청을 두고 좌우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뒤뜰인 아미산을 내다볼 수 있도록 건물의 동쪽 뒷면에 마루와 방을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교태전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다.
자경전은 고종 때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옛 자미당 터에 그 당시 대왕 대비였던 익종의 왕비인 신정 왕후 조 대비를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1867년에 준공되었으나 1873년에 불이 나서 1888년 고종 25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에, 동쪽 정면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가 붙고,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 그리고 서쪽 뒷부분에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과 대청이 잇달아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온돌을 깔고 옆으로 누마루를 앞뒤로 툇마루와 좁은 온돌방을 두었다. 자경전은 경복궁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침전 건물로 조선시대 왕비의 생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경 당시는 상당히 큰 규모였으나, 지금은 후원의 십장생 무늬의 굴뚝과 꽃담만이 그 당시의 화려한 면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보물 제809호이다.
자경전과 교태전 사이에 놓은 담으로, 담마다 화려한 무늬를 장식해서 꽃담 또는 화문장, 영롱장이라 불린다. 자경전이 대비의 처소이므로 정성껏 치장을 한 흔적이 보인다. 액자 그림처럼 박혀 있는 매화, 국화, 천도, 모란 연꽃 등의 꽃무늬들은 단순한 장식이나 미적 표현이 아니라 만수무강, 수복, 강녕, 벽사, 길상 등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환한 꽃처럼 행운이 가득하리라는 축원의 의미를 말해 주고 있다.
1867년부터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아미산 뒤쪽에 위치한다.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청궁을 지을 때 연못인 향원지를 파고 그 안에 작은 인공 동산을 만들어 향원정을 조성하였다. 또한 1456년 세조가 이곳에 취로전을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찍이 경복궁의 후원으로 가꾸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6모 지붕을 한 2층의 정자로 낮은 기단에 초석을 여섯 개를 놓고 완자 창살을 달았다.
향원지 뒤쪽으로 있었던 몇 채의 건물로 1873년 고종 10년에 지었다. 그 뒤 1915년 일본이 왜식 건물을 지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경복궁을 지은 뒤 고종이 친정에 임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1894년 고종은 일본의 압력을 피해서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다시 경복궁으로 오가던 끝에 을미사변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을 겪게 된다. 마침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에 변복을 하고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였던,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이 바로 건청궁이다.
경복궁은 한국의 북쪽 서울에 위치한 왕궁입니다. 원래는 조선시대인 1395년에 지어졌으며,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까지 조선의 주요 궁궐이었습니다. 그 궁전은 19세기 후반에 재건될 때까지 200년 넘게 버려졌습니다. 그 궁전 단지는 4백만 평방 피트 이상을 차지하는 꽤 크고, 그것은 많은 건물들과 정원들을 특징으로 합니다. 궁궐 내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로는 왕실의 연회와 의식에 사용되었던 경회루와 왕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와 관중을 위해 사용되었던 근정전이 있습니다. 주요 궁전 건물들 외에도, 그 궁전 단지에는 국립 고궁 박물관과 국립 민속 박물관을 포함한 여러 박물관과 갤러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박물관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된 전시물과 공예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경복궁은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며, 국가 행사와 공식 행사에도 사용됩니다. 방문객들은 궁전의 경내를 둘러볼 수 있고 하루에 여러 번 열리는 근위대 의식의 변화와 같은 전통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역사적 순간들
경복궁은 수 세기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떠들썩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길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은경복궁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들입니다.
-이 궁전은 원래 조선 왕조의 창시자인 태조에 의해 1395년에 지어졌습니다. 그 당시, 그것은 "빛나는 행복의 궁전"을 의미하는 경복궁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궁전은 몇 세기 동안 조선 왕조의 주요 왕실 거주지 역할을 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물을 추가하고 보수했습니다.
-1592년, 그 궁전은 임진왜란 동안 일본 침략자들에 의해 불타버렸습니다. 그것은 단지의 일부가 가축들을 위한 방목지로 사용되면서 2세기 이상 동안 폐허로 남아있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 고종의 통치 기간 동안, 경복궁을 이전의 영광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많은 원래의 건물들이 재건되었고, 새로운 구조물들이 단지에 추가되었습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의 일본 점령 동안, 그 궁전은 식민지 행정 사무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 다시 한번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1990년대에, 궁전의 많은 건물과 정원을 보수하고 재건하기 위해 주요 복원 프로젝트가 수행되었습니다. 오늘날, 경복궁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자 한국 문화 유산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며, 한국의 국가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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