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제주도는 1만 8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설화의 보물창고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몸집의 할머니인 설문대 할망 설화이다. 설문대 할망은 앞치마에 흙을 담아 바다에 부어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 여기저기에 잇는 많은 오름 들은 할망이 치마 자락에 흙을 담아 나를 때에 흘려버린 흙들이 쌓여서 된 것이라고. 할망은 몸집이 매우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가 제주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질 정도였다. 또 백록담에 엉덩이를 걸치고 두 다리를 뻗으면 한쪽 다리는 위미리 앞 자귀섬에 닿았고, 한쪽 다리는 제주시 앞 관탈섬에 닿았다. 또 돌아앉으면 한쪽 다리는 제주 서쪽 산방산에, 다른 한쪽 다리는 제주 동편 성산 일출봉에 걸쳐 ..

철저히 계획된 조선시대의 신도시 수원 그럼 수원화성이 어떤 점이 중요한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수원은 원래 정조대왕이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에 따른 풍수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효성의 이야기, 천도 설, 풍수설 조금씩 다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옛날의 어떤 책에 의하면 수원의 성곽을 부친에 대한 효심으로 정조대왕이 지었다는 얘기를 써놓은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효심이 작용을 했겠지만 원래 수원은 지금의 오산 수원대학이 있는 용주사 자리가 수원고을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지금의 자리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 옆에 성을 쌓았지만, 멀쩡하던 고을을 효심 하나 때문에 이주시키고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천 설 역시 근거가 ..

세계가 격찬한 수원 화성의 치밀함 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문화재는 종묘,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창덕궁 등이 있지만 특히 수원화성은 다른 유적에 비해 그 규모가 큽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유로는 종묘는 제사 지내는 대표적인 유적이기 때문이고 불국사는 신라 때 대표적인 불교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또 해인사 장경판전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불교 인쇄물이라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궁으로는 중국과 다른 양식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창덕궁을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수원화성은 우리나라가 성곽이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어서 대표적인 성으로 선정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 성곽과 수원화성이 비슷하지만 서울 성곽은 도로정비 등으로 성곽을 다 헐어내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

종묘에 관한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 그럼 이제 눈을 돌려 다시 종묘를 살펴보겠습니다. 종묘의 위치는 경복궁이 들어선 백악산의 그 한줄기가 도심까지 뻗어 들어오는 끝자락입니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경복궁에 이르고 다시 이어져 종묘에까지 닿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 했듯이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예외조항들이 있는데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 사람들도 위패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조신시대때 세자들 중에는 책봉이 되었다가 왕위에 못 오른 세자들이 있는데 이들도 죽고 나면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셨고, 죽은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도 종묘에 모셨던 것입니다. 현재 종묘에는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상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이은공 그리고 부인..

종묘의 풍수 지리적 위치 먼저, 풍수는 조화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사물과 공간의 배치와 배치를 다루는 고대 중국 철학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환경을 에너지의 자연적인 흐름, 즉 "기"에 맞추면, 개인들은 그들의 삶에서 균형과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서울에 위치한 종묘는 풍수지리의 원리를 구현하는 중요한 문화적, 역사적 장소입니다. 종묘는 조선시대인 14세기에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보존된 유교 왕실의 사당입니다. 이곳은 풍수지리학의 기본 원리인 남북축을 따라 조성된 직사각형의 땅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풍수에 따르면, 건물이 향하는 방향은 기의 건강한 흐름을 보장하기 위해 중요합니다. 남북 방향은 음양..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2 왕의 침전인 강녕전은 1395년 태조 4년에 창건하고 정도전이 건물의 이름을 지었다. 강녕은 5복의 하나로서, 임금이 강녕하면 그 혜택이 백성에게 이른다고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 고종 4년에 다시 지었다. 1867년 다시 불에 타 1888년 중건하였으나, 1917년 불에 탄 창덕궁의 내전인 회정전을 다시 짓는다는 구실로 철거하여, 목재를 옮겨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음과 양이 결합하는 침전에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가로막는다고 하여 없앴다고 한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1394년에 처음 지어졌다. 임..